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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 1.0 글 모음/Ver.2.0

글로써 풀이하지 못한다..라는 것을 깨닫다.




한동안 글에만 매진한채 잠깐 살기로 마음 먹었다.
그 글들에는 뼈져리게 시린 내용들이 적혀 있었으며, 그 글을 쓰고 난 나 자신도 읽기 거북할 만큼 치명적인 글들이었다.
(어쩌면 글쓴이의 주체가 나이기 때문에 나만 거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글을 씀으로써 풀이가 가능할 것으로 믿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더욱 쌓이게 되어 피폐해진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 누군가 그러했던가. 글이라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것이라고.

그 말이 진답이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나를 억압시키기 시작했고, 그 글들에 가장 많은 것들을 담는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많은 것을 담지 못하고, 아쉬움만 쌓였으며 많은 글들을 썼으나 답을 내리지 못한 나는 더더욱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미화화!
그것이 답이다.

미쳐버릴 지경에 이른 잠시 몇일 동안 나는 글쓰기를 중단할 것을 다시 마음 먹기 시작했다.
이 몇달동안 글쓰기를 그만 둘 것을 여러번 결심했었지만, 모두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들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이유는 없었다.
그 당시엔 제대로 된 이유라고 생각했었으나 쓴 웃음의 뒷 거리일뿐이었다.

이 몇일 동안 글쓰기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글쓰기를 그만둔다라는 단어는 무엇인가에 대한 색다른 고민이 내 머리 속에서 싹텄다.

먹는 것을 그만두고 마음을 비운다..라는 뜻을 지닌 '금식'.

중독된 무엇가를 그만두고 역시 마음을 비운다..라는 뜻을 지닌 '금단'.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이 아니메 그 속에 담긴 해석은 내 나름대로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 글 쓰기를 그만둔다라는 단어는?
그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답은 '금작'.

여기까지 결론이 나온 나는 이번에는 굳은 마음으로 금작이라는 단어를 에이포 용지에 크게 써두었다.
그러나 역시 또 그것뿐이었다.
그 중간에 갇힌 나는 이제 어떤 것을 어떻게 답을 내려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이도저도 못하는 것이 곧 사춘기 시절의 청소년 같다.
어쩌면 누군가처럼 글을 쓰는 것에 중독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이제 지쳐버린 상태.

나는 1학기때 즐겨하던 독서도 그만두었고, 한달에 몇편은 챙겨보던 영화도 그만두었다.
1학기 때의 학문에 대한 열정도 그만두었고, 내 취미 생활에 대한 열정도 고등학교 때처럼 겉치레 번번한 것에 그쳐버렸다.
덕분에 삶은 찌들었고, 열정없는 삶은 식어버려 이름만이 궁색한 그 무언가와도 같았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을 한다.
'소니' 라는 브랜드를 들으면, 화려한 디자인이 떠오르며 그들의 프리미엄성에 손을 내밀게 된다라고.
하지만, 그것이 곧 겉치레 번번한 것이라는 것은 팬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속 빠진 그 무언가라는 것을 사람들은 대체로 알지 못한다.
그것의 이유는 관심의 부족이다.
어떠한 것에 지대한 관심이 없으면 그냥 겉치레 번번한 것에 박수를 치고 탄성을 지를 뿐이다.

내가 그러했다.
뒤돌아서서는 자우림의 음악에 찌들었으며, 가사 하나하나를 마음에 저리며 아려왔다.
내가 했던 매니아적 생활은 단지 의지할 곳이 없어 의지한 것일뿐이었다.
그러나 겉치레 번번한 것은 그와 달랐다.
퀸의 음악적 대단함에 박수를 치는 것처럼 말을 했고, 가사를 음미한다라고 표현했다.
전자 제품에 대한 관심을 내 주체적으로 생긴 열정인 듯이 표현했다.
마치 무언가를 잘 안다는 식으로 표현했고, 그래서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을 했다.
집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집을 좋아하는 것처럼 표현했다.
난 집이 아닌 환풍도 잘 되지 않는 시시큼큼한 내 방을 좋아했더랬다.
표현의 차이는 사람들에게 나를 각인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다.
애써 미화화하는 것이지만은 그것들이 필요하다.
어찌되었건 제거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미화화라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애써 미화화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얘기를 던지는 예술인은 되지 못하지만.
오로지 나를 위해, 내가 관객이 되어, 내가 청중이 되어.
또한 또다른 감독이 되어 미화화한 채 나에게 보여주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필요하다라고 외치는 이것 또한 부족함 속에서 나오는 마음의 꿈트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누군가가 이런 나를 보고 안쓰럽다라고 한다면 나는 무언의 외침을 한 채 자우림 2집의 '그래, 제길 나 이렇게 살았어'를 들려줄 것이다.

한은 쌓이고 쌓여 이제 더 이상 내가 나를 억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리고 있다.
그에 반해 반대로 그 한계를 넘어서 억제할 수 있는 힘이 같이 생겨나고 있다.


생각의 증진.
그것은 곧 부족함에서 출발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생각이 많아진 것도 그 모든 것이 부족했던 고등학교를 겪고 나서야 가능한 것 아니었던가.

미화화.
그것은 곧 부족함을 달랠 수 있는 출발선이자 마무리이다.
곧 터지지 않게만 관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답안이라고 생각한다.


애써 지우지 못해 미화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라는 수식어와 '애써'라는 수식어의 의미는 무한대급으로 다른 것이다.


대충 마무리.


[까만거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