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고 영화고 모두 집어던진 상황에서 결국 억지글을 쓰고 말았다.
하기 싫어서 계속 내빼다가 눈 한번 딱 감고 독서를 했다. (눈감고? ;;)
쉽지 않았으나 그럭저럭 괜찮은 글이 나온듯 하다.
많이 참고 참으면서 컨트롤 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얼 쓰던 길게 쓰는 버릇은 대체 어떻게 좀 잡았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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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 작문]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이 책의 제목과 머리말을 본 나는 "아, 이 사람 TV에 대한 얘기들을 하려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TV가 곧 강요라는 생각 때문에 TV를 멀리 하는 나는 덕분에 책을 펴기가 싫어졌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섣부른 판단이었다. 이 저자는 TV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고 있었고, TV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들과 연결하는 등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었다. 비가 오는 새벽에 이 책을 읽었다. 몇몇 부분에 심한 공감을 하기도 했고, 제목에서 말하는 희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대중문화에 대한 리뷰 같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독특한 리뷰랄까? 그런 풍의 글들이었다. 책의 뒤편에 빨갛고 큰 글씨로 날카로운 관찰력이라는 문구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공감하게 되었다.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나의 무지를 탓하기도 하였다. 저자는 책을 서술하면서 다양하고 많은 책들의 내용을 인용했다. 동화를 좋아하면서 이후 소설도 즐겨 읽었었던 어린 나는 시간이 흘러 사춘기를 지나면서 세상을 알게 된 이후 책을 멀리 했다. 모두 가식적인 듯 해 보였고, 없는 희망을 지어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책들을 싫어했다. 반대로 신문을 접했고, 경제 신문을 읽었던 나는 덕분에 책을 더 멀리 했다.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나는 책을 멀리하고 반대로 경제에 관련된 책을 읽는 등의 행동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날카롭고 세세한 작가의 관찰력 덕분인지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고 조금이나마 시야가 트일 수 있었다. 작가가 발견한 세계를 나도 보고 싶다라는 욕구 때문인지 이 책에 서술된 책들을 읽어보고 싶었다.
이 책의 첫 부분인 '하루 24시간 뒤에 깃든 숨은 그림 찾기'는 책의 처음치고 강렬했다. 이 현대 사회에 살기 힘들어 하루 24시간 중 12시간 이상을 일하는 데에 바치는 사람들에게 순수성을 일깨워주는 부분이라고도 생각했다. 살기 힘들다며 한숨을 내쉬고 집으로 돌아와 TV 몇 편을 보고 잠에 들고 또 다시 일터로 나가는 그런 삶의 반복을 나는 참 싫어한다. "24시간 중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생존을 위한 노동에 침식당하지 않는 신성한 시간으로 남겨둘 수는 없는지"라는 작가의 말은 내가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을 멋진 말로 번역한 것 같았다. 뒤이어 나온 '선물의 철학'에서 텔레비전에 대한 서술 역시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TV를 보면 항상 나는 무언가 부족하다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것이 정신적인 부족이 아닌 물질적인 부족이라는 데에 나는 이질감을 느꼈었다. 어쨌든 작가가 이 부분에서 얘기하려던 선물에 대한 개념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 자유가 아닌 자유를 지닌 유목민의 이야기도 인상 깊었으며 학문에 대한 고민을 고등학교 이후로 여전히 하고 있는 나에게 던진 듯한 직업으로서의 학문 이야기 역시 무언가 답을 찾은 듯한 느낌이 내려온다.
반면에 '동화: 잃어버린 내 안의 어린 나를 찾아서'라는 부분을 읽을 때엔 평소의 억울함 같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다. 이는 작가에게 내는 화가 아닌 역시 세상에 대한 화였다. 나는 아름다운 동화를 학교와 어른들에게 들으며 더욱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알았고 나는 어른들이 왜 일찍이 현실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지 않고 이상향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던 것인가라고 회의를 느꼈다. 어차피 직면할 현실이라면 어릴 적에도 현실에 대한 얘기를 충분히 해주었어야 했는데, 갑자기 현실을 직면한 나는 어리둥절했고, 세상에 대한 반감만이 생길 뿐이었다. 이후 어른들에게 왜 이상향에 대한 아름다운 얘기만을 해주었느냐 라고 반문하니 순수할 적엔 순수한 얘기만을 들어야 한다고 답해주었다. 나도 물론 현실을 경험한 어른들이 순수함을 느끼지 못 한다라는 것에 측은함을 느끼고 있고, 어릴 적을 그리워하고 있다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의 나는 덕분에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얘기를 해줌으로써 자신들의 한을 푸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문제이고 영원히 헷갈릴 문제이지만, 이후에 아이들을 만나는 어른이 된 나는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내려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차 있는 나는 "어여쁘게 윤색되고 첨삭된 순수 버전의 동화만을 들려주는 일이 진정 아이들을 위한 길일까"라는 책의 부분에 별표를 쳐 두었다. 책을 읽으며 공감 가는 부분에는 밑줄을 긋는 나는 이 책의 이 부분은 아주 찢어서 따로 스크랩을 하고 싶을 정도로 문장 하나하나가 공감되어 왔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이 책의 작가는 동화책이나 이야기들이 유일한 친구였다면 지금의 나는 음악이 유일한 친구라는 점이다. 신곡을 멀리하고 가사를 중요시 여기는 나는 삶의 고통 속에서 희망을 보는 음악들을 좋아했었다. 덕분에 다양한 노래를 좋아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바로 그런 것들이 나만의 안식처였으며 나만의 친구였다.
이후 뒷부분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갑옷' 부분은 이제 문장 하나하나가 아니라 부제 하나하나, 내용 모두 하나하나가 내 마음과 머리를 아려왔다. 특히 슈렉2의 내용에 비추어 쓴 '미인보다 아름다운 괴물의 서사시'라는 글은 밑줄을 긋다 못해 책에 온갖 낙서를 해버렸다. 그만큼 마음에 절실했다는 나만의 행동일지 모른다. 나도 나를 알 수 없으니 알 수 없는 행동이다. 시련이나 아픔을 겪는다는 것은 평생에 좋은 기억으로 남지 못하고 어쩌면 악몽이 되어 잠결에 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의 아픔을 경험했기에 그 속에서의 희망을 보는 법을 알 수 있게 된다. 작가가 뒷부분에서 말한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텅 빈 놀이터에서, 물기 어린 망막에 비친 노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부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페이지를 넘기며 많은 이야기를 읽었다. 책을 읽을수록 작가가 옆에서 얘기를 해주는 것 같았다. 감상문에 쓰지는 않았지만,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해석 역시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들은 것 같지는 않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취향이 비슷한 느낌이었고 인터넷의 시시한 이야기들보다 훨씬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 했다. 독후감을 이렇게 밖에 적지 못한 것이 왠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독후감을 마친 후 책을 한 번 더 읽으면서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해보고 싶고 좀 더 많은 생각의 기회를 갖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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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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