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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 1.0 글 모음/Ver.2.0

녹색 식물을 무서워하는 아이.




오늘도 역시 TV를 보며 저녁을 먹었다.
나 혼자 먹을 땐..
그나마 챙겨 먹을 때에는 그냥 싱크대에 서서 먹거나 식탁에 던져 놓고 재빨리 먹는 주의인데, 나래와 먹을 땐 꼭 TV 앞에서 먹어야만 한다.
규칙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제는 아예 법으로 정해놓은 것만 같다. ;;


TV에서 딱히 볼 것도 없었지만, 뭔가를 TV에선 늘 한다.
유선 채널조차 나오지 않는 우리 아파트 TV는 정말 볼거리가 없곤 하다.

오늘은 녹색 식물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나왔다.
그 밖에도 몇몇 얘기가 나왔는데, 포스팅을 위해 이 얘기만 기억했다.

녹색 식물을 무서워하는 아이.
그 아이는 녹색 식물을 근처에 가기도 꺼려 했으며 엄마와 손을 잡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식물을 근처에 갖다 놓자 심지어 울기 시작했다.
증상이 아주 심했다.
T셔츠에 해바라기 그림이 있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였으니 그 정도는 안봐도 훤~하다.

그렇게 TV를 보고 있는데, 나래가 궁시렁 거린다.

 "아, 바보 같애. 왜 싫어해? 아니 울기도 해? 미친 거 같애. 쟤는 앞으로 살기 힘들겠다."
 "아니, 미친건 뭐고 살기 힘들 건 또 뭐 있어..(-_ㅡ;;)"
 "사람은 녹색 식물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는 법이야. 그러니 쟤는 앞으로 살기 힘들게 뻔하지."
 "굳이 녹색 식물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필요는 없는데? 사람마다 다른 걸꺼야."

 "그래도 앞으로 살면서 식물 볼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저러면 어떻게 해. 잔디도 가기 무서워 하는구만."
 "좀 천천히 봐봐. 뭔가 사연이 있겠지. 저 녀석, 분명히 식물에 대해 안좋은 기억이 있기 때문일거야."
 "겨우 21개월 산 애가 무슨 경험이 있다고 식물을 무서워해.."
 "그건 오빠도 알 수 없지만, 분명 안좋은 기억이 있으니까 저렇게 무서워하고 회피하는 거야. 쟤가 21개월 살았다한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이 프로그램 찍기 바로 어제, 혹은 그 전날에 안좋은 기억이 생겼을 수도 있는거니까."

그리고 TV를 계속 보았다.
결국 그 아이는 정신과병원에 갔더랬고, 의사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뿜어댔다.
나래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오와, 오빠가 맞췄네? 오빠는 저런거 어떻게 알아?"
 "경험이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저 아이를 위해 천천히 식물과 가까이 해줄 필요가 있어. 또 봐봐."
 "가까이 하기만 해도 우는 데 어떻게 가까이 해."
 "흠..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깝게 해주어야지. 방 안에 상추 한 잎을 놓고 또 한참 지나서 화분을 놓아 보고, 시간이 흘러서 화분을 좀 더 늘려보고, 공원에 가서 식물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것도 좋겠네."

그리고 TV에서는 의사의 말에 따라 공원에 엄마와 아이가 공놀이를 하러 갔더랬다.
잔디조차 밟지 못하는 아이를 엄마는 잘 컨트롤하지 못했더랬다. (그것이 연출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놀이를 하다가 결국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잔디를 밟았고, 공놀이를 할 수 있었다.


나래는 알지 못하는걸까?
아니면, 나 혼자만의 착각인 것인가.

비록 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21개월뿐이 되지 못했지만, 분명히 그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밖에 나가선 내가 원래 그렇다. 원래 중학교 때부터 그랬다..라고 말을 했더랬지만, 그냥 방패를 달은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겁이 나서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있었더랬지만, 새로운 것을 굳이 할 필요성이 없기에 다가가지 않는 것도 있다.

나래의 생각이 내가 비단 생각하는 어른들의 태도와 같은 것을 보고 잠깐 회의감을 느꼈더랬다.
우는 아이의 입장에서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온다.
그 TV프로그램에서는 식물을 싫어하는 아이를 갖고 심지어 놀기까지 했다.
상추로 바리케이트를 치니 그 선을 넘지 못했고, 아이는 어디를 가지 못하고 울기만 했더랬다.

나란 녀석도 저 아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더랬지만.
결국 나는 이런 이유로 아이들을 싫어한다.
개와 고양이 둘 중에 택하란 문제에서도 고양이를 택하는 이유도 단연 이것이다.

대충 마무리.


[까만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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