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er 1.0 글 모음/Ver.2.4

여행에서 돌아오다. 그리고 새로운 카테고리 증설..

앞 포스트에서는 존칭을 넣은 포스트를 했지만, 한동안 존칭을 생략한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예정이기 때문에 이런 글이 유지될 듯 싶다.


여행에서 돌아오다.
참으로 거창한 시작의 여행이었다.
첫날부터 부천에서 사고를 겪으며 앞으로의 난항이 예상되었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냥 강행군을 지속했다.
그리고 국도에서의 라이딩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지만은 그만큼 말도 안되는 여행 아니 훈련이었다.
게다가 나는 첫날의 사고로 인해 2일 안에 아산 방조제에 도착하겠다는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하자 저녁 9시까지 라이딩을 하는 무모한 시도를 하였더랬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다.
사고로 인해 허벅지는 간단한 타박상이었지만, 어찌되었건 약을 복용하는 상태였고, 체력은 바닥에 1월 1일부터 시작된 강추위는 좀처럼 식어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획은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라는 나의 신조가 또 어디선가 튀어나와 그 위험하다는 야간 라이딩을 지속하였다.
자전거 초보인데다가 라이딩 경력은 없으며 더더욱이 자전거 여행 경력은 없었기에 더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내 안에서 답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4일 정도가 걸려 아산 방조제를 지나 충청도에 도달했고, 서산까지 도착한 나는 그곳에서 답을 일구어 내게 된다.
그리고 나는 당장에 인천에 올라오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여행에서 찾으려던 답을 나는 일찍 찾을 수 있었고, 목표가 달성되었으니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답은 나왔으나 그 답을 시행할 심적 여유와 정신적 여유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더랬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었다.
심적으로 지쳐갔으며 정신적으로 지쳐갔고, 육체적으로는 저녁 때 찜질을 통해 간신히 회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여행 중에도 PC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제주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 때엔 목포까지 라이딩을 하기로 결심했으나 서산으로 가는 길목에 갓길이 없는 국도를 보고는 이렇게 목숨을 건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시 고민했다.
그럼, 이 상황에 필요한 여행이 무엇인가.
초심으로 돌아가 내가 원하던 여행이 무엇이었는가.
마음을 풀자고 떠난 여행이 마음을 옭아매면서 나는 생각 오브 생각의 늪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하염없이 생각을 하다가 나름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 날부로 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그것은 대전, 전주, 광주를 찍어 목포에 도달해 제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일생에 배를 타본 경험은 단 한번뿐이 없었다.
그것도 잘 기억나지 않는 초등학교 어느 한 때였기 때문에 이번에 배를 타면서 매우 흥미로운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배'라는 것은 참 재미난 운송수단이었다.

제주도..
제주도가 처음은 아니었다.
고2 언제였던가 수학여행이라는 빌미로 발을 들였던 곳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었다.
우리는 제주도를 갔음에도 불구하고 성산일출봉이 제주도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천지연 폭포가 어디에 있는지 제주도가 얼마나 넓은지(혹은 좁은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기념 사진이라는 빌미로 사진만 팡팡 찍다가 돌아온 것 뿐이었다.

제주도로 가는 길에.. 그리고 도착한 당일에 나는 뒤늦게 제주도에 관한 정보들을 물색했다.
뭐, 사실 그 이전에 PC방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하고 루트를 계획했지만, 나는 제주도 일주가 아닌 투어를 원했다.
어찌되었건 그렇게 제주도 일주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또 역경은 있어서 첫날 무리한 라이딩 덕분에 육체적 피곤이 몰려왔더랬다.
그래서 두번째 날은 무리하지 않고 말로만 듣던 마라도에 직접 발을 담갔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이 마라도를 가서 하는 말은 "아, 볼 것 없다." 라는 것일테지만, 나는 그만한 섬은 처음이었다.
뭐, 내가 섬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어찌되었건 마라도를 한바퀴 휙 돌면서 마냥 웃음이 났었더랬다.

셋째날은 계획한 투어를 진행해 초콜렛 박물관, 평화 박물관, 생각하는 정원. 이 세 곳을 들렀다.
사실 자전거로 다닐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달렸다.
달리면서 지치기도 하고, 꿀맛같은 투어를 하기도 하고 뭐, 그랬던 것 같다.
남들은 렌트카로 이곳저곳을 다니던데, 그래서 시간이 참 많이 남는 것들 같던데, 나는 계획의 절반뿐이 보지 못하고 아쉬움을 뒤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속은 시원했다.
네트 상에서 재미없다, 관람료가 아깝다는 등의 말이 많았던 초콜렛 박물관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준 박물관이었다.
난 4000원의 관람료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박물관의 관장님과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 관심분야와 그녀의 관심분야는 엄연히 다르지만, 왠지 모를 동질감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렵게 찾아간 평화 박물관.
그곳 역시 빠트렸으면 안되었을 중요한 곳이었다.
재미라고 하면 안되고 흥미라고도 하면 안되는 그곳은 어쨌든 유쾌한 곳이었다.
(사실 저런 표현을 쓰면 안되는 곳이지만, 나는 조용조용 거니는 것이 좋았다.)
참고로 평화박물관은 일제가 파 놓은 땅굴을 복원해 만든 박물관이었다.
잘 모르겠지만, 그래서 묘한 느낌이 들었는지 모른다.
개인이 사비를 털어 일제의 행패를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평화 박물관.
초콜렛 박물관에서도 그랬지만, 개인의 정성이 들어간 박물관이어서 나는 더욱 동질감이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비였다.
이 날 라이딩을 힘들게 했던건 비였는데, 가방은 출발 전 준비할 때 완벽한 방수 시스템(준비물마다 비닐에 쌓는 첨단 시스템;;)을 갖추어서 괜찮았는데, 우비가 찢어져 나는 비 맞는 거북이 꼴이 되었다. (응??)
평화 박물관에서 처음에 틀어주는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소나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나가 자전거를 안으로 들여놓았지만, 이미 틀린 일이었다.
뭐, 여행 후라서 얘기지만, 체인은 모두 녹슬었다.
주인이 무식한 탓이지..;;

그리고 간 생각하는 정원.
원래 이름은 분재예술원이지만, 규모가 확장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단다.
나는 그것을 몰라서 이 곳을 가는 도중에 표지판을 보는 데에 상당히 애를 먹었었다.
게다가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입구에서 손님이 하나도 없어 이걸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었지만, 나는 우산을 들고 과감히 들어갔다.
생각하는 정원.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의 대만족을 했고, 나는 출구를 나오면서 내가 나중에 아주 작더라도 조그마한 정원을 갖게 되면 생각하는 정원2 라고 이름을 짓겠노라고 다짐했다.
식물의 의미를 적어두고 그것을 통해 인생을 깨닫는 글을 적어놓은 글귀들은 나를 모두 감동시켰다.
나는 일개 컴퓨터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사실 내가 그것들이 좋은 이유는 IT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고, 인생을 깨닫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역사를 보면 인간의 인생에 비유가 가능하며, 인터페이스적 관점에 섰을 때에는 엔지니어적 시점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을 키워나갈 수 있다.
그래서 난 IT를 좋아한다.
일개 생각하는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식물을 보고 아, 이게 무슨 식물이구나..라는 것이 아닌 인생과 철학을 깨닫는 글귀, 그리고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비가 새근새근 오고 있어서 문제였지만, 내가 나중에 제주도를 가면 필히 한번 더 갈 곳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분재에 대한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나무를 옭아메어 일개 예술이라고 인간이 지칭하는 것은 단순한 억지성일뿐이다.

그리고 이 때에 가지 못했던 오실록이라든지 그 밖에 3 곳 정도는 나중에 제주시에 도착했을 때에 가볼 수도 있었지만, 그냥 남겨두었다.
이렇게 남겨두어야 나중에 제주도를 다시 찾을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금방 흘러 나는 또 야간 라이딩을 했고, 또 힘들어했다.
하지만, 이후 또 글을 끄적일 때에는 인간은 고통 속에서도 철학은 절대 잃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다음 날 나는 천지연 폭포와 정방 폭포에 다달았다.
천지연 폭포..
그곳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었다.
이 전날에 어느 곳에서도 많은 생각이 들다가 쳇.하고 돌아선 곳이 있었는데(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천지연 폭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3년 전 그 날이 필름처럼 지나갔고, 누구와 사진을 찍었는지도 기억이 났더랬다.
하지만, 분명히 이미지상 사라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어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럴싸했다.
그리고 폭포를 감상하진 않고 사진이나 펑펑 찍어대는 사람들이 나는 싫었다.
그리고 고2 그 날에도 있었던 그 이름 모를 화가는 이 날도 자리 잡고 있었다.
누가 앞에 앉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향한 정방 폭포가 나는 훨씬 더 멋져 보였다.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정방 폭포는 과연 예술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왜 천지연 폭포로 가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 앞에서 본 정방 폭포는 정말 바로 바다로 떨어져 바다의 파도와 한 집합을 이루고 있었다.
멋졌다.

서귀포시에는 언덕이 너무 많아 쉽지 않은 라이딩이었고, 구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후 다음 날에는 성산까지 라이딩을 했고, 성산 일출봉에서 나만의 2008년을 맞이하였으며(비록 일출은 보이지 않았지만;;)
성산에서 제주시에 올 때에는 너무 지쳐버려서 택시를 잠깐 탔지만, 중간에 내려달라고해 찝찝할 수 있었던 마음을 덜어버렸다.
그리고 제주시에 도착했을 때 저녁 7시 배를 타기 전에 소인국 테마파크로 제주도 버스를 타고 다녀왔고, 내 그래도 멋진 디카의 배터리부를 부숴먹고 말았다.

부산 가는 배도 참 흥미로웠으며, 나는 이번 여행 후 배라는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느린 듯 하면서도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보면 이만치 와 있는 배를 보니 인생도 그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 이번 여행은 한 단어로 '배'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부산에 가서는 그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도시에 휘말려들었고, 자전거는 고사하고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간애 없는 도시를 보고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친구 녀석의 학교를 가보기도 했고, 부산의 지하철과 버스를 모두 타면서 도시 구조에 대한 심층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울산행을 택해야 했지만, 계획과 달리 울산행 버스가 없어 잠깐을 갈팡질팡하다가 대구행 버스를 탔고, 대구를 구경한 뒤 울산에 갔다가 다시 대구로 와서 월드컵 경기장을 찍은 뒤 강남 터미널로 향했다.

여행이 끝난 줄 알았것만 그 때 하필 서울이 강강추위가 닥쳐 와서 손과 발이 동태되는 줄 알았더랬다. ;;

그리고 최악의 도시 부천을 지나면서 내 여행은 종지부를 찍었다.


짧게 쓰려던 글인데, 이왕 길게 된거 조금 더 써보면..

여행을 하면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주 작지만, 가라앉고 있음을 확인했고, 곧 군대 갈 녀석의 얼굴도 좀 더 봐두고 싶었다.
그 녀석은 아니라하면서 나와 무슨 대화를 하기를 원했다.
그 녀석이 이 글을 보진 못할테지만, 나를 필요로 해주어서 고마웠다.
군대 가는 마지막 날에 나는 내 능력껏 대답을 해주었는데, 그것이 답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돌아온 집에는 알고보니 내가 하고 있는 집안일은 상당했다.
설거지의 90%를 담당하고 있었고, 분리수거는 100%, 청소기는 60%, 군데군데 집안 정리는 40%, 걸레질 30%, 빨래 30% 등 알고보니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나래는 계획을 세워준대로 잘 하고 있어 고마웠다.


그리고 나는 이번 여행이 일종의 비약한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시작은 이제부터이며, 2월부터 나에겐 기점이다.
그리고 올해는 나에게 최대의 고비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한가하게 타이핑이나 할 군번인지 모를 일이지만, 어찌되었건 그러하다.

하루하루를 정리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