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포스팅.
제목을 짓는데에 한참을 고민했다.
짧은 자서전..
문득 자서전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가 궁금해 네이버 사전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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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自敍傳
[명사]<문학> 작자 자신의 일생을 소재로 스스로 짓거나, 남에게 구술하여 쓰게 한 전기. ≒자전(自傳).
자서전이라면 아주 이름 있는 사람이 만년에 쓰는 것으로만 알아 온 정 면장은 도무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자서전을 쓰라니 처음엔 사람을 놀리느라고 그러는가 싶었다.≪하근찬, 야호≫
(출처: 네이버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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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알고 있던 의미가 맞구나.
아무나 써도 상관없다는 뜻.
고로 이 초라한 나 역시 글을 쓴다.
내 가장 친한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도 모를만큼 나는 머리 속에서 근 2달동안 온갖 것들을 생각했다.
나름 멀티 코어인 내 머리는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하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하지만, 내 머리에도 한계는 있어서 근 2주간은 고문과도 같았다.
이제 그 결정을 내릴 때가 왔고, 결정을 내리지 않고는 내 머리가 무거워 버틸 수가 없다.
차츰 결정을 내린 저번주부터 .
나는 이 결정에 대한 준비인지 헷갈림 때문인지 머리가 너무나도 아파왔다.
개강과 함께 여러가지가 닥쳐온 나는 이제 버틸 수가 없다.
결단을 내릴 때가 왔고, 그 결정의 끝에 나는 서있다.
그에 따라 나는 틈을 내가며 내 취미생활도 대부분 접어버리고 머리를 굴려댔다.
유전적으로 흰머리는 이미 태생부터 나고 있었으나 스트레스성 흰머리도 나에겐 많다.
그 절정에 달았을 때 내 눈썹에선 흰 눈썹이 자라난다.
모디아와 울트라나브를 이용해 온갖 글을 작성하고 고등학교 때의 나처럼 혼자 숨겨두려고 했으나.
결정의 단호함을 보이기 위해 짧은 자서전을 만들어 블로그에 포스팅하기로 결심했다.
그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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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 2007.09.17_짧은 자서전.doc
위치: E:\[a_JS's Room]\[서류가방]
나는 태생에 정을 주고 마음을 주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중학교 시절까지도 그것을 좋아라 했다.
너무 좋아서 봉사라는 것도 좋았고, 사람 간의 구분이라는 것도 없었다.
길을 걷다가도 싱글벙글 잘도 웃었고, 그 때의 웃음은 정말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그런 진정한 웃음이었다.
지금도 중1 여름 방학 때 돈을 들여 꽃동네로 봉사하러 갔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때의 나는 반 애들 중 가는 사람이 없는 데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 부탁을 드려 다녀왔다.
사람들에게 마음 주고 정주는 것이 좋아서 봉사라는 것도 무척이나 해보고 싶어했다.
다녀온 나는 다른 애들이 그러했듯이 자아 성찰을 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나 대학교로 가거든 기필코 봉사활동 동아리 따위에 가입할 것이라고 굳게 마음 먹었다.
나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마음 주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라 했다.
마음을 주고 정을 주는 것을 표현하기는 쑥스러워 했지만 서도..
잘 해주고 하나라도 더 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좋아했다.
나는 자찬하기 꺼려지는 지금의 나지만.
그 때의 나는 효자라고 소문난 녀석이었다.
이웃 아줌마들이 시기를 할 정도로 나는 어머니께 극성이었다.
더 나이가 어릴 적엔 엄마가 슈퍼에라도 갈라치면 현관문에서 기다리기 일수였고.
몇 일 떨어져 있던 날에는 엄마 걱정에 잠에도 들지 못하는 바보아이였다.
밥을 먹을 때도 엄마의 한 숟갈을 먼저 보았고, 중학생이 돼서는 엄마와 대화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래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어릴 적에 이웃집에 가면 집에 도무지 올 생각을 하지 않는 나를 위해 우리 어머니께서는 나래를 낳아주셨다.
4살이 되어 나래가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왔고, 난 그 이후로 이웃집에 갈 생각을 당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집 밖에 몇 주 동안을 나가지 않았으니 그 감을 잡을 만도 하다.
그 당시 사진이라면 무조건 나래와 꼭 붙어있는 나를 볼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 이웃 애들과 놀 때에도 나래는 내 시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혹여나 다치지는 않을까, 누가 때리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에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 때에도 나는 나래를 항상 주시했다.
정을 주고 마음을 주고..
잘 해주고 하나라도 더 주고..
나는 그렇게 하라고 태어난 녀석이었나 보다.
그런 나를 사람들 역시 좋아했다.
엄마도 행복해 했고, 좋아했고, 나래도 그런 오빠를 좋아했다.
친구들도 그런 나를 좋아했다.
이미지 때문이 아닌 진정 나는 내가 좋아서 정을 주고 마음을 주곤 했다.
덕분에 이름도 모르고 간 중학교에서 중2에 올라서는 자연스레 반장으로 뽑히기도 했고, 나는 더없이 마음을 주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그 때의 추억거리들은 지금도 아련하다.
내가 중학교 때 울어본 기억을 되살려보라고 한다면, 중1 첫 중간고사 때에 수학에서 한문제를 틀렸다고 울었던 기억뿐이 없다.
난 그렇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했던 적도 있었다.
그 때의 나는 다른 애들처럼 평범했다.
나도 신곡을 즐겨 들었고, god 노래와 SES 노래들을 즐겨 들었다.
다른 애들처럼 게임도 즐겨 했고, PC방도 내가 신나서 잘 갔었다.
노래방은 조금 수줍어하기는 했지만, 역시 가라면 잘도 갔다.
컴퓨터를 조금 좋아해서 이러쿵저러쿵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고..
내 얘기를 하고파서 메일 친구들도 여럿 만들어 하루하루 재미나게 살았었다.
행복..
행복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정을 주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고, 일상이었고, 태생부터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었다.
덕분에 길을 걷다가도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고, 미소는 항상 내 얼굴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행복하던 시절에도 물론 잠깐의 방황기는 있었다.
중3 시절의 방황기..
하지만, 그 때의 사춘기는 사춘기 또래 애들이 모두 겪던 지나가는 사춘기 따위였다.
결코 심하지도 않았고, 결코 남들과 다르지도 않았다.
내 의지와는 달리 학원 시스템은 집에 새벽 3시에 도착해야 하는 강행군을 진행했다.
음악을 미친 듯이 소리 높여 들었고, 육체적 힘듦을 이겨내기 위한 의지할 곳을 찾아 나는 조금 유식한 척 따위를 할 수 있었던 휴대폰에 빠져 의지한다.
그러나 그 때도 행복이란 단어는 쓸 수 있었고, 나는 고등학교를 꿈꾸며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름도 몰랐던 고등학교를 입학했으나 나는 너무나도 부푼 꿈을 갖고 있었다.
꽤나 부풀어 있었다.
다시 떠올리기는 싫다.
이렇게 타자를 친다고 해서 떠올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글이라도 이렇게 끄적거리면 잠이 들 때 눈은 감을 수 있다.
누군가 그랬던가.
행복했던 기억은 금방 잊혀지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은 오래 남는다고..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진짜의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그렇게 고민하지 않고도, 머리가 크지 않아도 행복한 시절이 그 전까지는 있었으나 그런 고민에 빠지자 나는 한없이 안타까워졌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애들의 앞자락에 나서서 반장이 되면 어떻게 하겠다..라고 선포하던 그 때.
그러나 부끄럽게도 그 중 아무것도 실현된 것이 없다.
내가 중학교 때 반장과 부반장을 할 때엔 그 모든 것이 실현되었는데, 내가 간 고등학교는 그만도 못했다.
내 자신이 너무나도 나약하다고 생각이 들었던 그 때에.
나는 나만의 고찰을 위해 중학교 내내 갖고 싶었던 휴대폰을 갖은 6개월 뒤.
휴대폰을 포기하고 내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은 채 나의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을까..라는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겉으로만이라도 강해지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지만, 아직 마음을 다 잡지 못한 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
아픔과 슬픔은 그 때부터였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중학교 때까지 폭력이란 걸 몰랐던 나는 너무나도 많이 흔들렸다.
고1때의 시련이 나만의 시련이라고 생각했던 그 때에.
1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후유증은 굉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을 주는 것이 곧 필요 없는 일이라는 것조차 알게 된다.
정을 주고 마음을 주는 것이 무엇을 바랬던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결국 상처 받는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너무 많은 정과 너무 많은 마음들을 주던 것이었다.
그 때까지도 속은 여렸던 나는 마음을 아파하며 끙끙 앓는 것이 다반사였다.
다행히 죽음만은 면했지만..
그로 인해 나는 죽음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고 내 자신에 대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은 단단해지고 차가워지고 네모내지기.
난 그 때부터 사람을 가리기 시작했고, '내 사생활'이라는 말을 여기저기 덧붙이게 되었다.
그럴싸한 가면을 쓰기 위해,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 단단해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약했던 나는 그렇게 변해야만 하는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 아픔들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약해지는 길.
그 누군 가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나는 내 스스로 내 길을 만들고 그것을 밟고 지나갔다.
약해지지 않기 위해 옆에서 날라오는 주먹과 발길질을 맞아가며 그 길에서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랬었다.
다행히 날카로워지는 것에 그럴싸하게 성공한 나는 마음만은 아팠으나 그렇게 변한 나 역시 좋아하기 위해 노력한다.
애초에 좋아하지 않았던 검은색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 뿐이요, 단단해지기 위해 각진 것들과 쓴 맛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해야만 여린 나는 단단해질 수 있었다.
변명이라면, 나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나에게 발길질 했던 사람들과 손가락질 했던 사람들과 뒤에서 비웃었던 사람들 모두.
마음과 정을 아낌없이 주었으나 내 쓴 웃음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 모두.
2007년 졸업.
내가 그토록 꿈을 꾸던 졸업을 맞이하고 진짜의 나를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고등학교를 한탄했지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에서 필요한 것을 알려주었음에 감사하며 졸업을 맞이했다.
마지막에 나약해져 울음을 터뜨렸으나 그것은 더욱 상처가 되어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럼으로써 한번 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나는 내 웃음을 조금씩 되찾았다.
누군가에게 정을 주고 마음을 주면서 다시 진짜의 나를 되찾는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안돼..라는 말을 되새기며 일부러 고등학교 때를 되새기기도 하고, 정을 주려는 나에게 자책을 하기도 하고, 가면이 필요하다고 내 자신에게 따끔히 혼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나는 가면을 쓰지 않은 내 자신이 좋았고, 오랜만에 조금씩 진짜의 웃음을 짓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하지만, 너무나도 헷갈렸다.
예전으로 돌아가선 안돼!, 정을 주어선 안돼!라고 중간에 계속 되새기기는 했으나 이미 오랜만에 정을 주는 맛을 느껴버린 나는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진짜의 나'에 몰입되어 있었다.
그것이 결국 몸으로도 보였는지 친구들은 나에게 예전보다 얼굴색이 좋아 보인다, 밝아졌다, 웃어서 좋다..라는 등의 말을 해주었다.
나는 점점 행복이란 단어를 입에서 절로 사용하게 되었고, 진짜 행복을 서서히 찾아가는 내 모습이 너무 좋았다.
절친한 친구에게 "재성이는 점점 행복해지는 것 같아서 좋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기분은 참으로 말하기 힘들었다.
그냥 멍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큰 가면을 썼던 것인가..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중간 고등학교 때의 것들이 기억나 울상을 짓고 우울에 빠지기도 했다.
새벽 1,2시쯤 되면 6월의 기억이 되살아나 나는 지옥에 한번쯤 다녀오는 것만 같았다.
어정쩡하게 잠이 들면 고등학교 때의 악몽들이 꿈 속에서 재현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웃음으로 짓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나는 내 자신이 서서히 상처를 잊어가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여름 방학 때 봉사활동에 나서볼 것을 계획하기도 하고..
내년이면 진짜의 나를 다시 되찾고, 그 동안 썼던 가면을 활짝 벗고, 자우림, 퀸 등의 내 음악들은 단지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비틀즈 노래를 듣지 않아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나를 나 자신도 신기해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내가 변했다..라고 했지만, 변한 것이 아닌 진짜 내 자신을 찾은 그런 나였다.
단지 과도기였기에..
나도 내 자신이 너무나도 많이 헷갈렸고, 당황스러울 적도 많았다.
어쨌든 행복, 그 자체였다.
그러나 7월의 아픔이 찾아온 뒤 나는 많은 방황을 했다.
많이 아팠던 것 같다.
현재 글을 쓰고 있는 2달이 지난 지금도 머리가 무겁고 육체적으로도 정말 보약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닌가..라는 헛된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나약해졌다.
밥을 먹어도 살은 자연스레 빠져버렸다.
진짜의 나를 되찾던 과도기였던 나는 실수를 했다.
조절하지 못함이 나온 것이었다.
욕을 하지 않았으나 욕을 했고.
화를 내지 않았으나 화를 냈다.
2달이 지난 지금.
2007년 상반기를 돌아보는 지금에 있어서.
나는 너무 나약했다.
역시 '진짜의 나'는 세상에 쓸데 없는 몸뚱이일 뿐이다.
날카로워질 필요성이 있고, 각질 필요가 있다.
지금도 아찔하다.
그렇게 친구에게 의지해야만 했던 나를 생각하면 한없이 초라해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 때의 나를 보살펴준 친구에게 너무나도 고맙고 또 고맙지만..
역시 정이 많아 쓰러지는 진짜의 나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많이 여리다.
너무나도 많이 여리다.
그 여린 나를 각지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나는 내 속에 있는 '정'이라는 것을 빼낼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되새긴다.
너무나도 여린 진짜의 나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많이 안타깝고 또 안타깝지만..
이제 근 2달의 고민에서 끝을 내릴 때가 왔다.
고등학교 때의 나로 돌아가 '정' 이라는 것을 가뿐하게 버리도록 하자.
고등학교 때에는 처음으로 가면을 씀에 따라 속에서 울분이 터져 나왔으나, 지금은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고등학교 때 비교적 성공적인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들었고, 가뿐하게 그 때의 나로 돌아가면 그 뿐이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고독하게 살아가자.
조용하고 고독하게..
어차피 행복이라는 것은 다시 정의하면 그 뿐이다.
고등학교 때의 내가 내렸던 행복의 정의란.
내가 하고픈 일만을 고집하며 평생 글과 함께하는 인생을 꿈꾸지 않았던가?
누군가 내 얘기를 들으면 애써 변명이라고 할 지 모른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두려워 고등학교 때의 나는 내 속 얘기들을 모조리 숨겨왔다.
지금의 나는 떳떳하니 변명이라고 해봐야 비웃음 한번 해주면 그 뿐이 된다.
미친 듯이 검은색을 좋아하고.
미친 듯이 쓴맛을 좋아하자..
정 웃음을 짓고 싶을 땐 비틀즈의 음악으로 나를 다스리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결론을 내리는 근 두 달은 고문과 같았으나 그럴만한 필요성이 있다.
오히려 훨씬 더 잘 되었다.
만약 시간이 더 흘렀을 때 알게 되었다면 나는 또 한번의 시련을 겪었어야 할 것이다.
6개월 동안 만났던 진짜의 나는 행복의 극에 달았었다.
다시 이렇게 등을 돌리는 내가 측은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뿐이다.
날카로워지고..
입을 닫고..
내 얘기들을 끄적거리고 싶다면 음악에 그것들을 담아내면 그 뿐이다.
입을 꿋꿋이 닫고 조용히 고독하게 살아가자.
엉뚱하지만, 진정한 프로그래머는 고독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응?)
마무리는 늘 엉성하게..
2007.09.19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먼지가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
이 초라한 나 하나쯤 변한다고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으나.
나는 이 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날카로워지고 내 속의 '정'이라는 것을 제거한다.
'블로그'는 겉으로는 강했던 내가 약한 티를 낼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 공간의 허락마저도 나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정이 많고 마음을 잘 주고 하는 나는 이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입을 굳게 다물고 음악을 들으며 귀로 말하느니.
그것이 곧 행복이다.
. . .
다음의 고민거리.
1. 2008년 휴학.
2. 휴대폰의 처리 여부.
3. 남은 2007년의 대처 방법.
. . .
[까만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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